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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
작성일
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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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8
내용

옥상 휴게실에서 내려온 후 태희는 머릿속이 멍했지만 평소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다가온 금요일의 퇴근 시간. 건물 밖으로 나가자 길어진 해 덕분에 대낮처럼 여전히 환했다. 작렬하는 하늘 아래서 태희는 침착하게 역을 향해 걸었다. 퇴근하는 직장인으로 꽉 찬 강남의 거리는 번잡했지만 홀로 거리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날짜는 고작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불안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틀 이상 날짜가 어긋난 적이 없어서였다. 몇 번을 생각해도 피임은 확실히 했다. 잠자리 조건 중 하나였고 을 떠나려고 마음까지 먹었는데 눈이 멀어 그런 실수를 했을 리도 없다. 그런데 왜 안 하는 거냐고. 정말 미치겠네. 태희는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틈날 때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태희는 세 가지 가정을 세웠다. 첫 번째 가정, 스트레스를 받으면 생리를 건너뛰거나 불규칙하게 한다고 했다. “요즘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29년 중 최근 한 달이 가장 행복하고 무탈하고 편해서 문제였다. 두 번째 가정, 몸의 변화. “내가 몸이 안 좋아졌을까.” 매년 하는 건강검진에서 태희는 늘 건강했다. 식욕이 왕성해지고 식곤증이 생기긴 했지만 그건 다 강사준 때문이고. 그것 말곤 딱히 몸의 변화는 없었다. 세 번째 가정, 진짜 임신. “그건 말도 안 되잖아!” 혼자 버럭 성질을 내던 태희의 눈에 약국이 보였다. 힐긋 바라보며 약국을 스쳐 지나갔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약국으로 들어갔다. 바보같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게 아니라 이럴 땐 의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뭘 찾으세요?” “임신테스트기 하나, 아니 두 개 주세요.” 테스트기를 백에 넣고 약국을 나오는 그때였다. 불쑥 나타나 앞을 가로막은 사준 때문에 태희는 으악,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태희를 보고 사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손으로 제 어깨를 잡아 일으키는 사준을 노려보며 태희는 발끈했다. “애 떨어질 뻔했잖아!”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 사준이 피식 웃었다. “민태희, 이럴 땐 심장마비 올 뻔했다고 해야지.” “강사준, 이럴 땐 표현을 정정할 게 아니라 사과부터 해야지.” 이게 어디서 지적질이야. 나는 지금 심란해 죽겠는데. “미안, 놀라게 해서.” 연애를 시작한 후 사준이 달라진 것 중 하나였다. 태희의 말을 정말 잘 듣는 착한 애인이 되었으니까. 사준의 사과에 그제야 거칠게 일렁이던 태희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갑자기 회사엔 무슨 일이야? 평일엔 안 만나잖아, 우리.” “오늘 금요일이잖아. 내가 너 데리러 오는 날, 회사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날.” “……맞다.” 태희가 깜빡했다는 표정을 짓자 사준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나랑 한 약속도 잊고, 전화도 안 받고. 안 쫓아왔으면 어쩔 뻔했어.” “미안, 오늘 좀 정신없어서.” 힘없이 사과를 하는 태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준이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덮고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은 없는데, 어디 아파?” “열 없어, 아프지도 않고.” “그럼 약국에서 뭐 샀는데.” 사준의 질문에 순간 태희는 목이 콱 멨다. 말을 해, 말아. 마음 같아선 털어놓고 싶은데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요란 떨긴 싫었다. “박하스. 피곤해서 한 병 사 먹었어.” “흐음.” 의심스럽다는 듯 사준이 눈을 가늘게 뜨자 양심에 콕콕 찔린 태희는 발끈했다. “주말마다 너 때문에 푹 쉬질 못하니까 평일에 내가 병든 닭처럼 골골거리잖아.” “구박하지 마, 민태희. 네가 정한 그 규칙 지키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 중인데.” 주말에만, 그리고 하루에 한 번만. 그 약속을 사준은 투덜거리지 않고 제대로 지키고 있었다. 같이 좋다고 해 놓고선 사준에게 괜히 신경질을 낸 것 같아 태희는 먼저 손을 잡았다. “강사준, 나 팥빙수 먹고 싶어.” 달아오른 뺨과 뜨끈해진 머릿속을 식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팥빙숫집. 사준과 창가 자리에 앉아 망고 눈꽃 빙수를 열심히 먹는 그때였다. 아래에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 태희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가 태희의 바짓자락을 움켜쥐고 해맑은 눈망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모성애를 품고 태어난다고 했던가. 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태희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귀여워라. “너무 죄송해요!” 화들짝 놀라 다가와 아기를 품에 안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해 준 태희는 사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사준, 방금 아기 봤어?” “어.” 태희와 달리 관심이 없다는 듯 사준의 대답이 시큰둥했다. “완전 귀엽지?” “잘 모르겠는데.” “그럼 다시 봐 봐. 우리 뒤에 있어.” “난 아이한테 관심 없어. 좋아하지도 않고.” 그걸 잘 알지만 태희는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도 한번 봐 봐. 가끔씩은 속세에 찌든 뇌를 깨끗하게 해 주고 동심을 자극할 저런 천사들을 봐 줘야 한다니까?” “싫어.”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깔끔한 거절. “강사준, 나 진짜 궁금한 게 있어.” 대화 주제를 틀자 그제야 사준도 태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 “너 나한테 결혼도 하자고 했잖아.” 결혼이란 단어에 시큰둥했던 새까만 눈동자가 방금 전에 본 아이의 눈처럼 반짝거렸다. 이럴 때 보면 천재고 뭐고 사준도 애 같았다. “결혼이란 그 계획에 아이도 있어?” 사준의 마음이 궁금했고 그래서 묻고 싶었다. 임신테스트와 아기 아빠의 마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확인하는 절차 중 하나니까. “아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태희는 묘한 서운함을 느꼈다. 날 정말 사랑한다면 그래도 신중히 고려할 사항인데. “왜?” “왜긴. 나 혼자 사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애를 왜 낳아. 이 끔찍할 거야.” 그럼 결혼은 왜 하자고 했냐고 따지고 싶은 걸 참느라 태희는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그 속도 모르고 사준은 죄 없는 빙수를 스푼으로 푹 찌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너랑 나 사이에 뭐가 끼는 것도 싫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아빠 노릇 할 자신도 없고.” “…….” “할아버지도 그렇고 강 회장님도 그렇고. 나라고 뭐 다를 것 같아. 피는 못 속여.” 어이가 없는데 또 열 받을 만큼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희의 침묵에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사준이 비스듬히 시선을 틀었다. 남친 짤로 손색없는 꽃 미소를 머금자 주변 여자들이 힐긋거릴 정도였다. 하다못해 방금 전 아기를 안고 갔던 엄마조차도. 그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준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렇게 조심하는데 이상한 걱정하지 마. 99.9퍼센트 확률인 의학의 힘을 믿으라고.” 태희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그러니까 안심하라는 것처럼. 하지만 태희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 99.9퍼센트 확률이 지금 뚫릴 위기에 봉착했으니까. 만약 그 확률이 말도 안 되게 뚫린다면 강사준 넌 진짜 짐승이고 괴물이다. “그래도 만약에 생기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제야 선선한 웃음을 거둔 사준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민태희,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요즘 직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야. 만약에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대답을 하는 거. 재밌잖아.” “……나는 재미 없는데.” “난 재밌어. 그러니까 대답해 줘. 만약 너와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럼 넌 어떻게 할래?” 태희의 말에 사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것처럼. 그 한숨이 짜증스러울 만큼 거슬리는 건 왜일까. “책임은 져야겠지.” 태희는 사준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 “자네한테 연락이 올 줄은 몰랐네.”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선태를 제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한 달이 걸렸다. 자신을 알기 전 민태희가 어떻게 살았는지, 민선태란 작자가 어떤 인지, 그리고 강사준에 대해서도 알게 되기까지. 어이가 없을 만큼 웃음이 나왔고 또 화가 났다. 이 남자에게 생활비를 받기 위해 강사준과 친구가 된 민태희. 그런 태희를 친구란 명목으로 제 하인처럼 부려 먹은 강사준. 송현 부사장 자리도 아내 덕에 차지해 놓고, 그 자리를 보전하는 데 딸을 이용하려는 민선태. 7년이 흐른 뒤에야 제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친구 사이가 아니라 했던, 우정이 아니라 갑과 을이 정해진 계약 관계 같은 사이라고 했던 민태희의 말을. 왜 민태희가 잠자는 시간까지 줄이며 과외와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는지도. 태희 모녀에겐 그렇게 인색하게 굴었던 민선태는 제게 3억이란 거액을 망설임 없이 내밀었다. 서문의 사생아에게 제 딸을 어떻게든 한번 붙여 보겠다는 그 탐욕에. 그러니까 민태희는 자신의 자의와 상관 없이 효녀 심청이 된 상황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간절히 원하는 땅과 집을 돌려받기 위해 사준에게 팔려 가려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욕을 삼키며 제현은 입을 열었다. “제가 민선태 씨 뒷조사 좀 했습니다.” 뒷조사란 말에 느긋한 미소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러든 말든 제현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위태로운 부사장 자리를 어떻게든 유지해 보시겠다고 태희한테 강사준이란 친구와 결혼을 종용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상당히 거슬리는 말이군. 지 둘이 좋아서 연애하고 결혼도 하겠다는 거야.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가 바로 민선태 씨한테 왔을 것 같습니까? 태희와 만났고 충분히 대화하고 온 겁니다, 저. 태희는 그 친구에게 마음이 없고 민선태 씨 때문에 그 친구와 마지못해 연애하고 결혼하려는 거 다 알고 왔다는 뜻입니다.” 제현이 떠보는 말에 바보같은 선태는 한 번에 넘어왔다. 민태희의 유일한 사랑이자 첫사랑이란 타이틀은 지금도 그만큼 강력했다. “원래 결혼이란 게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사랑해 주는 남자랑 결혼해야 행복한 법이야, 나도 태희의 행복을 바라서 사준이를 사윗감으로 눈여겨본 거고, 험험.” 끝까지 제가 잘못했다고는 인정 안 하지. 제현은 앞에 있는 물잔을 선태의 뻔뻔한 얼굴에 뿌려 버리는 대신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그럼 저도 그 사윗감 후보에 넣어 주시죠.” *** 팥빙수를 먹고 집으로 오는 사준의 차 안에서 태희는 조용했다. 의미 없이 스쳐 가는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내일 보자는 말만 한 후 돌아서는 태희를 사준은 잡지 않았다. 그저 가늘게 뜬 눈으로 건물 안으로 여리여리한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지켜볼 뿐. 집에 들어가 불을 켠 태희는 스타베팅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으로 얼굴을 보여 줘야 가는 사준을 알아서였다. 차체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사준은 태희가 창문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자 그제야 차에 올랐다. 사준의 차가 사라지고 나서야 태희는 길게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우선 평소대로 하자.”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신 후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수의 수증기가 머릿속까지 들이닥쳤다. 시야가 흐리고 머릿속도 흐렸다. 평소처럼 샤워를 하며 태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임신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피임은 확실히 했고 그마저도 걱정이 돼서 두 번째 밤 이후 사준에게 피임 물품은 여러 개 준비하라고 했다. 그 한번이 너무 기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렇게 조심했는데 임신일 리가 없었다. 임신하면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입덧도 심하고 냄새도 잘 맡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태희는 잠이 오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그 잠도 평소보다 많이 먹으니 오는 식곤증에 불과했다. 주말마다 사준을 상대하느라 체력이 딸리니 몸이 자연스럽게 음식을 요구하는 거였다. 그런데 왜. 샤워기의 물을 잠그며 태희는 확신했다. 30살을 앞둬서 그런 거라고. 나이에 맞게 변화하는 것처럼 20살에 한 번, 30살에 한 번 그렇게. 어이없는 논리란 걸 알지만 간절하게 바랐다. 그게 아니고선 이유가 없으니까. 테스트기를 꺼내 설명서를 차분히 읽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걸 왜 하는 거지?” 임신일 리가 없는데, 그냥 병원이나 가서 정기 검진이나 하면 될 것을. “그리고 왜 나만 이렇게 심장 졸여야 하냐고.” 이 상황이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강사준한테 말하고 같이 심장 졸이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결과를 기다려야 했는데. 테스트기를 한 후 가지고 나올까 하다가 좌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욕실을 나와 평소처럼 머리를 말리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에 홍조가 돌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 같아서. 태희는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 머리를 말리고 스킨을 바르고 옷을 입고 마스크팩까지 얼굴에 붙이고 시간을 확인하니 20여 분이 지났다. 그제야 태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욕실 문을 열었다. 여유는 딱 거기까지였다. 시선을 내려 변기 뚜껑 위에 놓인 임신테스트기를 본 순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두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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